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영화 누룩 리뷰 (트라우마, 방어기제, 성장)

방구석김차장 2026. 8. 7. 08:33

목차


    영화 누룩 리뷰 (트라우마, 방어기제, 성장)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그냥 막걸리 좋아하는 소녀의 청춘물이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다슬이라는 18살 소녀가 누룩에 집착하는 모습이 어딘가 낯설지 않아서, 그게 오히려 더 오래 마음에 걸렸습니다.

    누룩이라는 이름의 마지막 동아줄

    영화 속 다슬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양조장에서 자란 아이입니다. 그녀에게 막걸리는 음식이 아니라 하루의 리듬이자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양조장의 누룩이 사라지고, 다슬은 환청과 악몽에 시달리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정신병 아니냐고 수군거리지만, 영화는 그 집착을 단순한 이상 행동으로 처리하지 않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반응을 방어기제라고 부릅니다. 방어기제란 견디기 힘든 불안이나 고통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심리적 전략을 말합니다. 다슬이 누룩에 집착하는 행동은 그 교과서적인 예처럼 보였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런 집착이 외부에서는 얼마나 이상하게 보이는지 잘 압니다. 저도 어린 시절 불안이 극도로 높아졌을 때 특정 물건을 곁에 두지 않으면 잠을 못 자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그때 그 물건이 없어졌을 때의 공황에 가까운 느낌을, 다슬의 표정에서 다시 만난 것 같았습니다.

     

    영화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다슬이 대형 양조장 창문을 벽돌로 깨고 들어가 누룩을 훔쳐오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양심의 가책 대신 묘한 흥분이 서려 있었는데, 그 표정이 오히려 더 씁쓸하게 다가왔습니다. 트라우마(trauma), 즉 심리적 외상을 입은 사람이 회복을 위한 수단을 찾을 때 종종 윤리적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아무 설명 없이 그냥 보여줍니다. 이 장면 하나에서 감독이 하려는 말의 절반쯤은 이미 전달된 것 같았습니다.

     

    다슬이 영화 내내 보이는 증상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환청과 반복되는 악몽
    • 특정 자극(누룩의 부재)에 의한 급격한 기능 저하
    • 감정 기복과 충동적 행동(절도)
    • 대인관계 위축과 고립감

    이러한 증상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특징적 양상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PTSD란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이후 그 기억이 반복적으로 침투하고 일상생활이 어려워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국내 정신건강 전문기관인 국립정신건강센터에 따르면, 청소년기에 겪는 정서적 트라우마는 성인기의 그것보다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슬의 나이가 18살이라는 설정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치유는 누룩이 돌아오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지점은 사실 오빠 캐릭터였습니다. 오빠는 동생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계속 충돌을 일으킵니다. "병원을 가야지"라고 소리치는 오빠와 "누룩만 찾으면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확신하는 다슬 사이의 간극, 그것이 저에게는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긴장감이었습니다.

     

    정신건강 분야에서 말하는 공감적 경청은 단순히 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세계관 안으로 들어가 그 감각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의미합니다. 오빠는 그것이 되지 않았고, 반대로 기자라는 인물은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다슬이 "느낌만으로 누룩을 찾겠다"고 했을 때 기자가 "멋있는데요"라고 답하는 장면, 제 경험상 그 한마디가 어떤 긴 설명보다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영화가 좀 아쉬웠던 부분도 여기에 있습니다. 서사의 파편성이라고 할까요. 불황자들의 등장과 소멸, 목욕탕에서 오빠가 혼자 빈 바구니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 이런 요소들이 후반부로 갈수록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보다 각자의 상징으로만 남아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감독의 철학적 메시지를 담으려는 의도는 충분히 읽혔지만, 대중 관객 입장에서는 몰입의 고리가 자꾸 끊기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영화 속 다슬이 심리 상담을 받는 장면도 짧지만 의미심장하게 등장합니다. 인지행동치료(CBT, Cognitive Behavioral Therapy)는 왜곡된 사고 패턴을 인식하고 바꿔나가는 치료법으로, 트라우마 관련 장애에 가장 많이 활용되는 근거 기반 치료 방식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트라우마를 경험한 청소년에게 CBT를 포함한 전문적 심리 개입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다슬이 상담을 받으면서도 "누룩만 찾으면 돼"라는 믿음을 놓지 못하는 장면은, 치유라는 것이 외부 조건이 채워진다고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용히 드러냅니다. 그게 씁쓸하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묘사였습니다.

     

    영화 누룩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로 모아집니다. "당신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제가 직접 겪어보니, 그 물음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다슬의 이야기가 더 깊이 박힙니다.

     

    배우 출신인 장동윤 감독이 팬데믹 시기의 고립감에서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아프고 외로운 사람이 손을 뻗을 곳을 찾는 이야기, 그리고 그 손을 어떻게 잡아줄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 영화가 완벽하진 않더라도, 이 질문만큼은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보고 나서 자신의 가장 버거웠던 시절을 돌아보고 싶다면, 한 번쯤 마주할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심리·의료 조언이 아닙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yLarauMgl9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