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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쩔 수가 없다 (구조조정, 실직 공감, 블랙코미디)

방구석김차장 2026. 9. 3. 06:07

목차


    영화 어쩔 수가 없다 (구조조정, 실직 공감, 블랙코미디)

     

    몇 년 전, 팀장이 조용히 저를 따로 부르던 그날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십 년 넘게 다닌 회사였는데, 짐 박스를 받아 들고 엘리베이터를 내려오던 그 몇 분이 인생에서 가장 길었습니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를 보는 내내 그 날의 감각이 자꾸 되살아났고, 씁쓸한 웃음과 뜨끔한 공감이 번갈아 찾아왔습니다.

    해고라는 도끼, 영화 <어쩔 수가 없다> 속 구조조정의 민낯

    영화는 주인공 유만수가 한여름 마당 바베큐를 즐기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안정된 직장, 넓은 집, 아름다운 아내와 아이들, 반려견까지. 그가 "지금 내 기분이 어때? 좋아?"라고 말하는 순간, 관객은 이미 불길한 예감을 갖게 됩니다. 행복감이 정점에 달할수록 추락의 낙차가 크다는 건, 살면서 한 번이라도 벼랑 끝에 서본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아는 사실이니까요.

     

    만수는 태양제지에서 20년 넘게 커리어를 쌓았고 그해 펄프맨상까지 수상한 인물입니다. 펄프맨상이란 제지업계에서 뛰어난 기술력과 공로를 인정받는 권위 있는 상으로, 그만큼 만수가 업계 안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정리해고 대상이 됩니다. 미국계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가 회사를 인수한 직후였습니다. 사모펀드란 소수의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아 기업을 인수한 뒤 수익을 극대화하는 금융 주체로, 비용 절감을 위한 대규모 인력 감축이 단골 수법으로 활용됩니다. 경력이 길다는 건 연봉이 높다는 뜻이고, 그것이 곧 해고의 이유가 됩니다. 제가 직접 겪어봤기 때문에 이 장면이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회사에 오래 있을수록 더 위험해진다는 역설, 만수의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국내 고용시장의 불안정성은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실제로 통계청 고용동향 마이크로데이터에 따르면 2024년 국내 비자발적 실직자 수는 137만 명을 넘어섰으며, 전년 대비 10만 명 이상 증가했습니다(출처: 통계청 고용동향). 만수의 상황이 영화 속 설정이 아니라 매년 반복되는 현실이라는 뜻입니다.

    실직의 공감, 같은 처지의 사람을 짓밟아야 살아남는 구조

    3개월간의 구직 활동이 실패로 끝나자, 만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같은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들을 사전에 제거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 대상은 알코올 의존증(Alcohol Use Disorder)을 앓고 있는 구범모, 일본 제지업계 경력에도 불구하고 구두 가게 점원으로 생계를 잇는 고시조, 그리고 현재 잘나가는 제지회사 반장 자리에 있는 최선출입니다. 알코올 의존증이란 음주를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고 신체적·심리적으로 알코올에 의존하게 되는 만성 질환으로,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한 중장년 남성에게서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영화가 영리한 지점이 있습니다. 제거 대상들이 전혀 악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들 역시 수십 년을 종이 산업에 바친 사람들이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인물들입니다. 만수와 이들의 차이는 단 하나, 지금 이 순간 어느 쪽이 자리를 꿰차느냐의 문제뿐입니다. 저는 이 구도가 영화에서 가장 불편하면서도 가장 정직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스템에 저항하거나 연대하는 대신,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소모적으로 싸우게 만드는 구조, 그것이 이 영화가 진짜 고발하는 대상입니다.

    영화에서 반복되는 "어쩔 수가 없다"는 대사는 미장센(Mise-en-scène) 차원에서도 작동합니다. 미장센이란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영화 용어로, 화면 안에 배치되는 공간, 조명, 소품, 배우의 동선 등 시각적 요소 전반을 가리킵니다. 박찬욱 감독은 세 남자의 저택을 각각 억압, 고립, 과시욕의 공간으로 설계해, 관객이 대사 없이도 인물의 내면을 읽을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이 공간들이 만수에게 침범당하거나 만수 자신의 집에서 진실이 폭로되는 구조는, 건축 공간 자체가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장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구범모 내외와 총을 두고 벌이는 몸싸움 장면 —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며 블랙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 고시조와의 대화 장면 — 따뜻한 가장 만수와 냉혹한 범죄자 만수의 양면이 한 장면 안에서 공존합니다.
    • 최선출과의 음주 장면 — 이병헌의 만취 연기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수준으로 리얼합니다.

    자본주의의 도끼질과 AI 시대의 불안, 블랙코미디로 그려낸 이유

    영화 말미에는 로봇이 종이를 옮기는 불 꺼져가는 공장이 등장합니다. 만수가 그토록 원하던 자리에 겨우 앉았지만, 그 공장은 이미 자동화(Automation)로 대체되어 가는 중입니다. 자동화란 인간의 노동을 기계나 소프트웨어가 대신하는 산업 전환 과정을 뜻하며,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 중장년 숙련직 노동자의 일자리를 빠르게 잠식하고 있습니다. "이젠 됐다"며 쾌재를 부르는 만수의 얼굴이 뼈아프게 슬픈 이유는, 그가 얻은 자리조차 이미 소멸 중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이 장면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가 만수의 살인 행위보다 이 공허한 결말에서 더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고 느꼈습니다. 골드만삭스가 2023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생성형 AI 확산으로 전 세계적으로 약 3억 개의 일자리가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됩니다(출처: Goldman Sachs). 영화가 그리는 공장의 풍경은 먼 미래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비판적으로 보는 지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영화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정확하게 겨냥하면서도, 결국 주인공이 같은 처지의 약자들을 제거하는 방식을 장르적 유희로 소비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저항이나 연대가 아닌 파멸을 택하는 만수의 선택이 설득력은 있지만, 그 선택을 스타일리시하게 포장할 때 관객이 무엇을 가져가야 하는지 다소 모호해집니다. 이 부분은 영화를 보고 나서 차 안에서 한참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극장에서 나와서도 머릿속에 오래 남는 종류의 작품입니다. 이병헌과 손예진의 연기는 두말할 것 없고,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9분간의 기립 박수를 받은 이유가 화면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내 업종에 모든 것을 바치면 삶이 의미 있다는 믿음이 흔들리는 시대,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스크린 밖으로도 한참 이어집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극장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77Yes279dV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