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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 첫날,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돌아서는 길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버텼다가 결국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회사에 가고 싶다고 수없이 생각했는데, 막상 그 순간이 오니 발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영화 <첫 번째 아이>를 보면서 그날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육아 드라마가 아닙니다. '엄마'라는 이름 아래 조금씩 지워지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워킹맘이 겪는 경력단절의 현실
일반적으로 복직한 워킹맘은 금방 업무 리듬을 되찾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회사에서는 아이 걱정을 숨긴 채 에이스처럼 굴어야 했고, 집에 오면 육아와 살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몸은 두 곳에 있을 수 없는데 마음은 항상 두 곳에 묶여 있는 느낌이었죠.
영화 속 주인공 정화도 똑같았습니다. 친정 엄마가 쓰러지고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지는 순간, 그녀의 커리어는 다시 벼랑 끝에 섰습니다. 보모를 구하고, 이웃에게 신세를 지고, 어린이집 대기를 기다리는 그 과정이 얼마나 소진적인지 직접 겪어본 사람은 압니다.
경력단절(Career Break)이란 출산이나 육아로 인해 노동시장에서 일시적 혹은 장기적으로 이탈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경력단절이란 단순히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넘어, 개인의 전문성과 사회적 연결망이 함께 끊어지는 복합적 손실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수준으로, 경력단절 여성은 2023년 기준 약 139만 명에 달하며 그 주된 이유가 육아와 임신·출산에 집중됩니다(출처: 통계청).
영화가 현실적으로 느껴진 이유 중 하나는 남편 우석의 태도였습니다. "힘들면 그만둬, 내가 벌게"라는 말, 저도 들어봤습니다. 그 말이 위로처럼 포장돼 있지만 실제로는 경력과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말이라는 걸, 당사자가 아니면 모릅니다. 우석이 회식 자리를 일찍 나온 것을 '본인이 노력하는 증거'로 꺼내는 장면은 특히 뼈아팠습니다. 그는 그것을 '희생'으로 인식하는 반면, 정화는 매일의 기본값으로 그 이상을 감당하고 있었으니까요.
이 영화가 포착한 핵심은 이른바 정신적 부하(Mental Load)입니다. 정신적 부하란 가사나 육아에서 발생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계획, 기억, 조율의 부담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오늘 분유 떨어졌나 확인하기", "어린이집 대기 신청 기한 챙기기" 같은 것들인데, 이것이 거의 전적으로 정화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우석은 큰 결정에는 목소리를 내지만, 일상의 세세한 부담은 그녀 몫이었죠.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그냥 '워킹맘이 바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직접 겪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바쁜 것과 혼자인 것은 전혀 다른 감각입니다.
육아정체성 상실, 영화가 건드린 진짜 상처
영화 후반부에 정화가 남편과 다투다 집 밖으로 뛰쳐나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복도에서 이웃 아주머니와 마주친 순간, 그녀는 "서윤 엄마지, 나 엄마라고"라는 말을 듣습니다. 짧은 대사인데 그 울림이 오래 남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제 이름보다 '○○ 엄마'라는 말이 더 많이 불리게 되는 경험, 워킹맘이라면 한 번쯤 알 겁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역할 정체성 갈등이라고 합니다. 역할 정체성 갈등이란 개인이 동시에 여러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때 각 역할의 요구가 충돌하면서 자아 인식이 흔들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직장인, 아내, 엄마, 그리고 '나'라는 네 가지 역할 사이에서 정화가 보여준 혼란은 이 갈등의 교과서적 장면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 갈등은 생각보다 훨씬 조용하게 찾아옵니다. 어느 날 친구와 카페에 앉아 있는데, 대화 주제가 온통 아이 이유식, 어린이집 대기번호, 보모 후기로 가득 찬 걸 깨달았을 때 묘한 서글픔이 밀려왔습니다. 정화가 영화관에 혼자 들어간 장면이 왜 그렇게 공감되는지, 그때 비로소 이해했습니다.
일과 가정의 균형이라는 표현 자체가 다소 추상적으로 쓰이는데, 실제로는 균형이 아니라 끊임없는 트레이드오프(Trade-off), 즉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잃게 되는 구조적 충돌입니다. 쉽게 말해 매일 무언가를 포기하는 일의 반복입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유자녀 취업 여성의 일·가정 양립 어려움 호소 비율은 70%를 넘으며, 그 부담이 여전히 여성에게 편중되어 있습니다.
영화에서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족 보모 화자를 둘러싼 갈등이 다소 작위적으로 전개되고, 멍 자국 같은 소재가 긴장감을 위해 급하게 소비된 느낌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 아쉬움을 상쇄할 만큼, 영화가 건드린 정체성 상실의 감각은 정직하고 날카로웠습니다.
정화가 눈물을 흘린 건 단순히 힘들어서가 아니었을 겁니다. 아내로, 직장인으로, 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이 조금씩 흐려지는 것을 느끼는 슬픔이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워킹맘의 현실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데 솔직히 그 말이 제일 공허하게 들렸습니다. 문제는 개인의 욕심이 아니라,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구조가 그녀에게 쏠려 있다는 것이니까요. <첫 번째 아이>는 그 구조적 불균형을 조용하지만 또렷하게 짚어냅니다. 워킹맘이든 아니든, 한 번쯤 보고 나서 주변의 누군가를 다르게 바라보게 되는 영화입니다.